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붉은 군대의 공격 준비 == [[이오시프 스탈린]]은 만주 침공을 위한 총 책임자에 전 총참모장이자 자타공인 소련군 최고의 두뇌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계급)|원수]]를 임명하고 극동의 [[스타프카 대리]]에 임명해 만주 침공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다만 1945년 초 [[베를린]]을 향한 마지막 공세에서 보여준 주코프의 모습으로 판단할 때, 권력에 대한 견제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주코프가 공세 작전의 적임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만하다.]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소련군은 7월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전략방면군]]을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는 바실렙스키가 취임했다.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만주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프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집단군을 상대로 잔뼈가 굵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자바이칼 전선군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2근위군을 지휘해 천왕성 작전에 참여하고,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카르파티아 산맥을 석권하며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제2극동전선군에는 전 칼리닌전선군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유마셰프 해군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특히 [[핀란드]]의 험지에서 오랫동안 싸워 와서 험지 기동의 전문가가 된 메레츠코프와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기동전을 벌인 말리놉스키의 경험은 무척 중요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년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말리놉스키가 독소전에서 지휘했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부와 메레츠코프가 지휘했던 카렐리야 전선군 사령부는 그대로 극동으로 이동했으며 제6근위전차군, 제39군, 제5군, 제53군은 동유럽의 점령지에서 대 이동을 시작했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국가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동쪽으로 이동하는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Glantz-lp7.pdf|소련군 편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